학교보다 빠른 학습, 득일까 실일까?
자녀 교육을 생각하실 때 많은 부모님들이 한 번쯤은 ‘선행학습’에 대해 고민해 보셨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교육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경쟁이 심화되는 시대에는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미리 공부해 두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마저 생기고 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님들 사이에서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서둘러 수학이나 영어는 물론이고 과학, 사회까지 앞서가는 학습을 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학교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이 우리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있을까요? 아니면 어른들의 조급한 마음이 아이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선행학습, 언제부터 이렇게 당연해졌을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 중학교 내용을 배우거나, 중학생이 고등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학년마다 배워야 할 내용을 차례로 익히며 자연스럽게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기 교육 시장의 확대, 사교육의 발달, 입시 경쟁의 심화는 자녀를 뒤처지게 하지 않으려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1년 앞서가고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조바심을 느끼게 하지요.
그 결과, 아이들은 아직 해당 학년의 개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그보다 앞선 내용을 억지로 익히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공부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선행학습의 장점,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행학습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선행학습은 적절하게 활용된다면 분명 자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학교 수업이 쉬워질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미 한 번 배운 내용을 교실에서 다시 접하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고 수업 참여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특히 수학처럼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는 과목은 기초 개념을 미리 다져두는 것이 다음 단계의 이해를 도와줍니다.
둘째,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줍니다. 학교 수업을 복습처럼 느끼게 되면 아이 스스로 학습을 정리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할 여유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셋째, 자신만의 학습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앞선 학습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공부 방법을 일찍 터득하게 되면 장기적으로도 학업 효율을 높이는 데 유리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놓치기 쉬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행학습이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 방식이 아이의 현재 수준이나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수업 무력감’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아이는 수업에 흥미를 잃고 집중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지루하다고 느끼며 수업시간을 흘려보내게 되고, 그런 습관이 반복되면 결국은 수업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게 됩니다.
또한, ‘깊이 없는 지식’을 쌓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행학습은 빠르게 다음 단계를 가르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용해 보는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문제를 잘 푸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다른 유형이 나오면 당황하거나 손을 놓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학습에 대한 번아웃(burnout)입니다. 아이가 너무 어릴 때부터 많은 양의 학습을 소화하다 보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공부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잃게 됩니다. 실제로 조기 선행을 오래 해온 학생일수록 고등학교 시기에 공부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는 사례가 자주 보고되고 있습니다.
아이마다 다른 '적정 속도'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가 같은 나이에 같은 속도로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이는 조금 느리지만 깊이 있게 배우고, 어떤 아이는 빠르게 습득하되 자주 복습해야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행학습은 ‘빠르게 배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아이의 학습 스타일과 이해 방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쉽습니다.
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배우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교재 진도만 나가다 보면 중요한 기초가 비어 있는 채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고,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부모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아이에게 '얼마나 앞서가고 있느냐'를 묻기보다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 내용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멈춤이 더 나은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교육은 마라톤입니다. 지금 당장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것보다 꾸준히, 그리고 건강하게 달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에 치중한 나머지 학습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이의 공부는 성적이 아닌 성장의 과정이어야 하고,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스스로 배움을 즐기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느린 듯해도 결국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결론: 빠름보다 깊이, 선행보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학교보다 빠른 학습이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움은 아이가 스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이의 나이, 성격, 학습 스타일, 감정 상태 등을 고려하지 않은 선행은 결국에는 아이의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아이를 잘 알고, 아이를 믿고, 아이와 함께 배우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선행이든 복습이든 어떤 방식이든 그 아이는 결국 스스로 자기 길을 찾고 멋지게 걸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